일 년 중 도시들이 바빠지는 시기가 언제인가?
이 질문을 들으면 대다수의 사람들이 연말이라고 답할 정도로 해의 마지막 달인 그림자 6월은 모두가 인정하는 가장 바쁜 시기였다.
그중 에오르제아 북쪽 커르다스에 위치한 성도 이슈가르드는 유독 바쁜 모습을 보였다.
'아 이 차디찬 공기였지.'
두꺼운 옷 사이를 뚫고 들어오는 시린 바람과 입을 열 때마다 나오는 하얀 입김 그리고 그 앞에 있는 우뚝 솟은 회색빛의 벽돌 건물은 에스티니앙이 기억하는 성도의 모습이었기에 그에게 과거에 대한 생각을 서서히 불러일으켰다.
하지만 성도의 문을 통과하고 보이는 풍경은 에스티니앙이 기억하는 과거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이전의 칙칙한 분위기가 아닌 한껏 연말 분위기로 주변이 알록달록하게 꾸며져 있었다. 마치 과거에 머물지 않는다는 듯, 변화가 일어났다는 것을 보여주는 풍경에 그는 과거에 깊게 잠기지 않고 청회색의 눈을 한번 깊게 감았다 뜨고는 길을 따라 올라가기 시작했다. 물론 옅은 미소를 머금고 말이다.
용과 인간의 오랜 전쟁에 마침표를 찍은 빛의 전사에 의해 성도는 새로운 미래와 변화를 맞이하였다. 기존의 통치체계를 평민의회와 귀족의회로 이분화함과 동시에 현재 귀족들의 의장으로 아이메리크가 취임하게 되었다. 전쟁의 종결을 선포한 후 복구가 필요한 곳엔 보수공사가 바로 진행되었고 장인들과 성도의 사람들이 함께 가꿔나간 창천 거리에는 어느새 활기가 가득해졌다. 이러한 평화를 이룰 수 있도록 큰 공헌을 해준 모험가와 그의 동료들에게 감사함을 표하고자 두 의회에서 행사를 개최하자는 의견이 나오게 되었다. 물론 그 의견에 모두가 만장일치를 하여 별빛축제 기간에 성도에서 연회를 개최하게 된 것이었다.
변화가 찾아온 만큼 이 연회 또한 특별하였다. 예전이었으면 귀족들만이 즐길 수 있는 것이었지만, 이번 연회는 귀족과 평민 상관 없이 누구나 올 수 있었다. 신분에 차별 없이 열리는 첫 행사였던 만큼 예상 이상으로 많은 사람들이 방문하였다.
물론 연회의 주인공은 당연히 특별 초대 손님인 새벽의 혈맹이었다. 성도 사람들은 이 변화의 바람을 가져다 준 그 주인공이 누구인지 눈으로 직접 보고 싶었기에 당연한 것이기도 하였다.
"많은 사람들 앞에 오랜만에 서려니 긴장되네."
"나가기 전까지... 흐트러진 곳은 없는 지 확인하십시오."
"... 원래 이렇게 떨리고 했던가?"
"편히 심호흡해. 그저 평소처럼 가볍게 인사해 주면 되는 거야."
아이메리크의 초청을 받아들이고 성도에 발걸음을 한 새벽의 일원들은 평소보다도 긴장한 모습이 역력했다. 한껏 멋지게 차려입고 여러 사람들 앞에 서는 건 다들 오랜만이었으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어머, 당신은 긴장되지 않은가 보네요?"
"워낙 어릴 때부터 이런 자리를 갔었으니까."
야슈톨라의 질문에 이안은 과거를 떠올린 것인지 복잡 미묘한 심정으로 서 있었다. 4대 귀족 가문과 맞먹는 귀족 가문의 도련님이기도 했던 이안은 유년기 시절 수도 없이 이런 행사에 갔을 테니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다. 하지만 어린 나이에 자세를 갖추고 어른을 대하고 했던 소년은 어느새 성인이 되고 이젠 귀족이 아닌 모험가로서 이곳에 서 있었다.
그런 이안의 과거를 알고 있던 에스티니앙은 이안이 알아서 잘할 거라는 것을 알고 있었으면서도 이제는 그와 특별한 사이인 만큼 그를 위한 말을 해주고 싶어서 이안의 옆에 가까이 섰다.
"나가고 싶을 땐 언제든지 와. 난 창가 쪽에 거의 서 있을 테니까."
말이 끝남과 동시에 보이는 옅은 웃음, '언제든지 오면 준비하고 있을게'라는 말이 담긴 그 웃음은 에스티니앙만의 표현이기도 하면서 이안이 가장 좋아하는 표정이기도 하였다. 이안은 그에 자연스레 웃어 보일 수밖에 없었다.
머지않아 아래층에서 아이메리크의 말이 들림과 동시에 대기실의 문이 열리고 연회의 주인공들은 하나 둘 계단을 내려갔다. 끝없이 쏟아지는 박수소리에 어색하게 또는 자연스럽게 축하를 받은 새벽의 혈맹은 이내 준비된 잔을 들고 의장들의 건배사에 맞춰 잔을 마주대었다. 연회장에 한껏 울려 퍼진 잔이 부딪히는 소리들은 마치 이 평화를 축복하는 종소리처럼 들리기도 하였다.
건배사가 끝나고 새벽의 혈맹에게 궁금증이 많은 사람들 또는 그들의 팬인 사람들이 다가오곤 하였다. 다수는 그들에게 친절히 답을 해주곤 하였지만 에스티니앙은 애초에 연회에 온 것부터가 큰 걸음을 한 것이었기에 자연스레 테이블 쪽으로 자리를 옮긴 지 오래였다.
과거 푸른 용기사였던 시절에도 에스티니앙은 연회 초청을 여러 번 받았지만 연회장에 있는 사람들 다수가 귀족이거나 높은 위치에 있는 자들이었기에, 에스티니앙 입장에선 그런 자들에게 잘 보이고 싶은 마음이 추호도 없어서 발길조차 주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 연회는 과거의 동료이자 친구이기도 한 아이메리크가 간곡히 부탁하기도 하였으며 새벽의 혈맹 일원으로서 가는 것이기도 하였기에 어쩔 수 없이 오게 된 것이기도 하였다.
'적당히 먹고 마시다가 가면 되겠지. 얼굴은 비췄으니까.'
이왕 이렇게 오게 된 겸 산해진미라도 먹고 가자고 생각한 에스티니앙은 자연스레 테이블에 차려진 음식 한두 점을 접시에 담아 먹기 시작하였다. 성도를 떠나고 혼자만의 여행을 다니면서 에스티니앙은 자연스레 여행지의 여러 음식을 먹을 기회가 많았다. 그러다 보니 어느 순간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을 즐기게 되었기에 기회가 오면 에스티니앙은 마다하지 않았다. 성도에 있으면서 자주 봤던 음식들, 여행을 하며 봤었던 음식들, 새로운 음식들을 눈에 담으며 천천히 맛을 보고 여유를 즐기고 있던 바로 그때였다.
우와아아-
많은 사람들과 함께 즐기는 행사인 만큼 연회장의 중앙 공간은 무대나 다름없기에 보통은 비워져 있는 공간이었다. 그 주변에서 사람들의 환호가 들렸다면 분명 춤을 추고자 선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라는 걸 에스티니앙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함성소리와 더불어 귀족들의 소곤거리는 말소리가 많아지면서 에스티니앙의 귓가를 간지럽혔다.
"저분 설마... 그 도련님이지?"
"맞아 맞아. 가주님이랑 똑 닮았네! 이쪽 봐주셨으면 좋으련만."
여인들의 목소리에 에스티니앙은 신경이 쓰여 결국 먹던 접시를 테이블에 두고 사람들이 서 있는 쪽으로 다가갔다. 설마 하는 예상대로 연회장 가운데에는 그가 잘 알고 있는 사람 둘이 서 있었다.
한 명은 모험가이자 전 이슈가르드의 귀족 도련님인 이안이 그리고 그의 춤 파트너로는 새벽의 마녀인 야슈톨라가 서 있었다.
서로의 손을 잡고 자세를 잡은 둘은 노래가 연주됨과 동시에 춤을 추기 시작하였다. 둘이 풍기는 어른스러운 분위기와 무섭게도 잘 맞는 호흡에 모두가 둘을 숨죽이고 바라봤다.
"... 나도 빨리 어른이 되어서 저렇게 멋지게 춤추고 싶어."
"정말 둘이 완벽에 가깝게 춤을 추는 걸... 대단해."
둘의 모습을 바라보며 부러워하는 알리제와 놀라워하는 그라하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에스티니앙은 눈빛 하나 흔들리지 않고 이안과 야슈톨라의 모습을 눈에 담고 있었다. 음악의 강약과 리듬에 맞춰 밟는 스텝과 턴, 자연스러운 스킨십과 서로를 바라보는 눈빛. 그저 둘이 춤을 추고 있는 것임에도 에스티니앙은 왠지 모르게 불편한 느낌이 들었다.
눈에 보이는 광경을 바라보는 것이 싫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계속 보기에는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고 싶어지는 이 미묘한 느낌에 에스티니앙은 자기도 모르게 눈썹을 살짝 까딱이며 정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느새 음악이 막바지에 다다르자 둘이 자세를 취하고 인사를 하였다. 멋진 모습을 보여준 이안과 야슈톨라에게 쏟아지는 박수갈채에 에스티니앙은 자신이 느낀 것도 이 소리에 묻혀 없어질 것이라는 생각을 하였다. 하지만 야슈톨라만 들어가고 이안이 손을 잡고 이끈 사람을 본 순간, 에스티니앙은 눈을 이내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이봐, 내가 이 위치인 거야?"
"그럼 네가 하려고 했어?"
"... 이런 면에선 아직 건방진 게 남아있다니까."
"칭찬 고마워."
무대로 나온 산크레드는 이안과 자세를 잡는 거에서부터 티격태격하였다. 이안은 귀족 도련님이었으니 남자, 여자 춤 모두 알고 있기도 하였지만 산크레드 또한 정보 수집을 위해 춤을 배웠던 만큼 춤을 잘 추기도 하였다. 하지만 신장차이가 꽤 나는 둘이기도 하기에 누가 허리를 잡고 잡힐지에 있어서 약간의 신경전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둘이 웃으면서도 서로가 한쪽이 져달라는 듯 바라보는 그 눈빛과 표정은 에스티니앙의 복잡한 심경을 더욱 건드릴뿐이었다. 불편한 기색이 조금씩 커지기 시작할 즈음 산크레드가 이안의 허리를 잡는 게 눈에 들어오자마자 에스티니앙의 감정은 한계치에 다다르고야 말았다.
'동료여도 불쾌해, 나를 제외한 아무도 닿지 못해, 저리 치워, '
한껏 강해진 불편한 감정은 에스티니앙의 머릿속에 문장으로 퍼져나갔다. 이윽고 산크레드를 뚫어지게 바라보던 에스티니앙은 손에 들고 있던 샴페인 잔을 가장 가까운 테이블에 두고는 이내 연회장 안쪽으로 한걸음 한걸음 발걸음을 향하였다.
"... 사람들이 기다리겠어. 나랑 추지, 이안."
팔을 뻗어 산크레드와 이안이 깍지 잡은 손을 잡고 에스티니앙은 말을 내뱉었다. 평소보다도 더 저음인 목소리에 그를 바라본 둘은 아주 잠깐 눈빛으로 주고받더니 이내 거리를 벌렸다. 자연스럽게 산크레드와 이안의 손깍지가 풀리자마자 에스티니앙은 잡고 있던 손을 떼었다가 그대로 이안의 손을 맞잡았다. 당연히 반대쪽 손으로 이안의 얇은 허리를 잡았기에 단숨에 자세가 만들어지게 되었다. 그런 에스티니앙의 모습을 본 산크레드는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으쓱하며 다시 관중들 속에 들어갔다.
"예전에 배우긴 했지만 난 여성 춤은 몰라. 너는 알 테니까, 맞춰줄 거지?"
"내가 모를 리가 없잖아."
다시 평소처럼 돌아온 표정, 아니 어쩌면 남들보다 더 부드럽게 바라보는 표정에 이안은 웃음을 머금고 답하였다. 자세를 가다듬고 서로 마주한 에스티니앙과 이안의 모습에 많은 사람들의 관심이 둘에게 집중되었다.
전직 푸른 용기사와 전 이슈가르드 귀족 도련님, 이제는 같은 새벽의 일원인 둘.
사람들의 작은 대화소리가 오고 가고 머지않아 바이올린 소리가 들리며 둘은 천천히 스텝을 밟기 시작했다. 외관적으로 매우 잘 어울리는 둘의 조합과 물 흐르듯 이루어지는 춤, 예상 이상으로 호흡을 잘 맞추는 둘에 모두가 감탄하며 바라봤다.
춤이란 둘이서 하나가 되어 움직이는 것이라는 말처럼, 에스티니앙과 이안은 때로는 눈을 바라보다가 때로는 눈을 감고 자연스레 몸을 맡기며 동작을 이어갔다. 춤에서 느껴지는 그들의 신뢰와 그 밑에 깊이 숨겨진 서로에 대한 애정에 아름답다며 감탄하는 사람들도 나오기 시작했다.
음악이 끝나고 둘의 동작도 동시에 멈추자 아까보다도 더 큰 갈채가 둘을 향해 쏟아졌다. 춤이 끝나고서야 에스티니앙은 아까 전 느꼈던 감정 대신 만족감을 느꼈다. 무엇이든 이안과 함께하는 건 언제나 좋았기 때문이기도 하였다.
함께 무대를 나온 둘은 목을 축일 겸 샴페인 잔을 손에 들고 연회장의 발코니로 향했다. 초겨울 밤이었지만 흔하지 않은 쾌청한 날씨였기에 춤으로 뜨거워진 열기를 식히기에는 더없이 알맞은 장소였다.
"춤추는 건 안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 근데 아까 나오면서 보인 눈빛 뭐야? 산크레드도 놀라서 비켜줬잖아."
"다른 사람이 애인의 약한 부위를 잡는 데, 어느 누가 좋아하겠어."
질문이 끝나기 무섭게 나온 에스티니앙의 말에 이안은 잠시 멍하니 그를 바라보며 아까 전 상황을 돌이켜 생각해보았다. 분명 에스티니앙이 나오면서 보였던 눈빛은 약간의 분노가 서려있는 눈빛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산크레드가 들어가고 이안이 다시 그를 바라봤을 때는 평소와도 같은 눈빛이었다. 그때서야 이안은 에스티니앙이 질투라는 감정을 느꼈다는 것을 눈치챘었다. 이렇게 자신만을 바라봐주는 것에 이안은 내심 기쁘기도 해서 그를 바라보며 웃을 수밖에 없었다.
"네가 남을 질투한다니... 정말 해가 서쪽에서 뜨는 거 아닌지 몰라."
"나도 누군가를 이렇게 아끼고 좋아하게 될 줄 어떻게 알았겠어."
"후훗, 그건 나도 마찬가지이긴 하지."
에스티니앙의 말에 이안 또한 동의하였다. 만약 에스티니앙이 다른 사람과 춤을 추고 상대방이 자신이 좋아하는 에스티니앙의 신체 부위에 노골적인 스킨십을 한다면... 자신이라도 기분이 좋진 않았을 테니까.
"그래도 아까 춤 잘 추던데. 연회 거의 안 갔다면서?"
"몸으로 배우는 건 나름 잘 기억하니까. 너도 오랜만에 춤춘 거일 텐데 자연스럽던데."
"칭찬 고마워. 아까 전 수고했으니 건배나 하자."
쨍-
두 사람의 잔이 부딪힘과 동시에 잔이 기울어지며 흐르는 샴페인이 둘의 목을 적셨다. 춤을 추던 그 짧은 시간 동안 서로에 대한 감정이 전해졌기에 이 겨울밤 공기가 차가운 것이 아니라 시원하게 느껴진 것이라고 에스티니앙과 이안은 생각했다.
뜨거운 사랑은 서로에 대한 신뢰를 느끼게도 하나, 상대방과 주변을 보다 보면 질투라는 감정이 생기기 마련이다.
이 질투가 과도해지면 상대방을 소유하고 싶은 집착이라는 안 좋은 방향으로 향하게 되기도 한다.
하지만 질투는 때론 상대방을 얼마나 애정하는지를 느끼게 해주는 좋은 요소가 되기도 한다.
서로가 특별하다는 것을 다시금 느끼고 한껏 단단해지는 둘의 사랑은 한겨울의 추위도 이길 만큼 뜨거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