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질문을 들으면 대다수의 사람들이 연말이라고 답할 정도로 해의 마지막 달인 그림자 6월은 모두가 인정하는 가장 바쁜 시기였다.
그중 에오르제아 북쪽 커르다스에 위치한 성도 이슈가르드는 유독 바쁜 모습을 보였다.
'아 이 차디찬 공기였지.'
두꺼운 옷 사이를 뚫고 들어오는 시린 바람과 입을 열 때마다 나오는 하얀 입김 그리고 그 앞에 있는 우뚝 솟은 회색빛의 벽돌 건물은 에스티니앙이 기억하는 성도의 모습이었기에 그에게 과거에 대한 생각을 서서히 불러일으켰다.
하지만 성도의 문을 통과하고 보이는 풍경은 에스티니앙이 기억하는 과거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이전의 칙칙한 분위기가 아닌 한껏 연말 분위기로 주변이 알록달록하게 꾸며져 있었다. 마치 과거에 머물지 않는다는 듯, 변화가 일어났다는 것을 보여주는 풍경에 그는 과거에 깊게 잠기지 않고 청회색의 눈을 한번 깊게 감았다 뜨고는 길을 따라 올라가기 시작했다. 물론 옅은 미소를 머금고 말이다.
용과 인간의 오랜 전쟁에 마침표를 찍은 빛의 전사에 의해 성도는 새로운 미래와 변화를 맞이하였다. 기존의 통치체계를 평민의회와 귀족의회로 이분화함과 동시에 현재 귀족들의 의장으로 아이메리크가 취임하게 되었다. 전쟁의 종결을 선포한 후 복구가 필요한 곳엔 보수공사가 바로 진행되었고 장인들과 성도의 사람들이 함께 가꿔나간 창천 거리에는 어느새 활기가 가득해졌다. 이러한 평화를 이룰 수 있도록 큰 공헌을 해준 모험가와 그의 동료들에게 감사함을 표하고자 두 의회에서 행사를 개최하자는 의견이 나오게 되었다. 물론 그 의견에 모두가 만장일치를 하여 별빛축제 기간에 성도에서 연회를 개최하게 된 것이었다.
변화가 찾아온 만큼 이 연회 또한 특별하였다. 예전이었으면 귀족들만이 즐길 수 있는 것이었지만, 이번 연회는 귀족과 평민 상관 없이 누구나 올 수 있었다. 신분에 차별 없이 열리는 첫 행사였던 만큼 예상 이상으로 많은 사람들이 방문하였다.
물론 연회의 주인공은 당연히 특별 초대 손님인 새벽의 혈맹이었다. 성도 사람들은 이 변화의 바람을 가져다 준 그 주인공이 누구인지 눈으로 직접 보고 싶었기에 당연한 것이기도 하였다.
"많은 사람들 앞에 오랜만에 서려니 긴장되네."
"나가기 전까지... 흐트러진 곳은 없는 지 확인하십시오."
"... 원래 이렇게 떨리고 했던가?"
"편히 심호흡해. 그저 평소처럼 가볍게 인사해 주면 되는 거야."
아이메리크의 초청을 받아들이고 성도에 발걸음을 한 새벽의 일원들은 평소보다도 긴장한 모습이 역력했다. 한껏 멋지게 차려입고 여러 사람들 앞에 서는 건 다들 오랜만이었으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어머, 당신은 긴장되지 않은가 보네요?"
"워낙 어릴 때부터 이런 자리를 갔었으니까."
야슈톨라의 질문에 이안은 과거를 떠올린 것인지 복잡 미묘한 심정으로 서 있었다. 4대 귀족 가문과 맞먹는 귀족 가문의 도련님이기도 했던 이안은 유년기 시절 수도 없이 이런 행사에 갔을 테니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다. 하지만 어린 나이에 자세를 갖추고 어른을 대하고 했던 소년은 어느새 성인이 되고 이젠 귀족이 아닌 모험가로서 이곳에 서 있었다.
그런 이안의 과거를 알고 있던 에스티니앙은 이안이 알아서 잘할 거라는 것을 알고 있었으면서도 이제는 그와 특별한 사이인 만큼 그를 위한 말을 해주고 싶어서 이안의 옆에 가까이 섰다.
"나가고 싶을 땐 언제든지 와. 난 창가 쪽에 거의 서 있을 테니까."
말이 끝남과 동시에 보이는 옅은 웃음, '언제든지 오면 준비하고 있을게'라는 말이 담긴 그 웃음은 에스티니앙만의 표현이기도 하면서 이안이 가장 좋아하는 표정이기도 하였다. 이안은 그에 자연스레 웃어 보일 수밖에 없었다.
머지않아 아래층에서 아이메리크의 말이 들림과 동시에 대기실의 문이 열리고 연회의 주인공들은 하나 둘 계단을 내려갔다. 끝없이 쏟아지는 박수소리에 어색하게 또는 자연스럽게 축하를 받은 새벽의 혈맹은 이내 준비된 잔을 들고 의장들의 건배사에 맞춰 잔을 마주대었다. 연회장에 한껏 울려 퍼진 잔이 부딪히는 소리들은 마치 이 평화를 축복하는 종소리처럼 들리기도 하였다.
건배사가 끝나고 새벽의 혈맹에게 궁금증이 많은 사람들 또는 그들의 팬인 사람들이 다가오곤 하였다. 다수는 그들에게 친절히 답을 해주곤 하였지만 에스티니앙은 애초에 연회에 온 것부터가 큰 걸음을 한 것이었기에 자연스레 테이블 쪽으로 자리를 옮긴 지 오래였다.
과거 푸른 용기사였던 시절에도 에스티니앙은 연회 초청을 여러 번 받았지만 연회장에 있는 사람들 다수가 귀족이거나 높은 위치에 있는 자들이었기에, 에스티니앙 입장에선 그런 자들에게 잘 보이고 싶은 마음이 추호도 없어서 발길조차 주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 연회는 과거의 동료이자 친구이기도 한 아이메리크가 간곡히 부탁하기도 하였으며 새벽의 혈맹 일원으로서 가는 것이기도 하였기에 어쩔 수 없이 오게 된 것이기도 하였다.
'적당히 먹고 마시다가 가면 되겠지. 얼굴은 비췄으니까.'
이왕 이렇게 오게 된 겸 산해진미라도 먹고 가자고 생각한 에스티니앙은 자연스레 테이블에 차려진 음식 한두 점을 접시에 담아 먹기 시작하였다. 성도를 떠나고 혼자만의 여행을 다니면서 에스티니앙은 자연스레 여행지의 여러 음식을 먹을 기회가 많았다. 그러다 보니 어느 순간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을 즐기게 되었기에 기회가 오면 에스티니앙은 마다하지 않았다. 성도에 있으면서 자주 봤던 음식들, 여행을 하며 봤었던 음식들, 새로운 음식들을 눈에 담으며 천천히 맛을 보고 여유를 즐기고 있던 바로 그때였다.
우와아아-
많은 사람들과 함께 즐기는 행사인 만큼 연회장의 중앙 공간은 무대나 다름없기에 보통은 비워져 있는 공간이었다. 그 주변에서 사람들의 환호가 들렸다면 분명 춤을 추고자 선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라는 걸 에스티니앙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함성소리와 더불어 귀족들의 소곤거리는 말소리가 많아지면서 에스티니앙의 귓가를 간지럽혔다.
"저분 설마... 그 도련님이지?"
"맞아 맞아. 가주님이랑 똑 닮았네! 이쪽 봐주셨으면 좋으련만."
여인들의 목소리에 에스티니앙은 신경이 쓰여 결국 먹던 접시를 테이블에 두고 사람들이 서 있는 쪽으로 다가갔다. 설마 하는 예상대로 연회장 가운데에는 그가 잘 알고 있는 사람 둘이 서 있었다.
한 명은 모험가이자 전 이슈가르드의 귀족 도련님인 이안이 그리고 그의 춤 파트너로는 새벽의 마녀인 야슈톨라가 서 있었다.
서로의 손을 잡고 자세를 잡은 둘은 노래가 연주됨과 동시에 춤을 추기 시작하였다. 둘이 풍기는 어른스러운 분위기와 무섭게도 잘 맞는 호흡에 모두가 둘을 숨죽이고 바라봤다.
"... 나도 빨리 어른이 되어서 저렇게 멋지게 춤추고 싶어."
"정말 둘이 완벽에 가깝게 춤을 추는 걸... 대단해."
둘의 모습을 바라보며 부러워하는 알리제와 놀라워하는 그라하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에스티니앙은 눈빛 하나 흔들리지 않고 이안과 야슈톨라의 모습을 눈에 담고 있었다. 음악의 강약과 리듬에 맞춰 밟는 스텝과 턴, 자연스러운 스킨십과 서로를 바라보는 눈빛. 그저 둘이 춤을 추고 있는 것임에도 에스티니앙은 왠지 모르게 불편한 느낌이 들었다.
눈에 보이는 광경을 바라보는 것이 싫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계속 보기에는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고 싶어지는 이 미묘한 느낌에 에스티니앙은 자기도 모르게 눈썹을 살짝 까딱이며 정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느새 음악이 막바지에 다다르자 둘이 자세를 취하고 인사를 하였다. 멋진 모습을 보여준 이안과 야슈톨라에게 쏟아지는 박수갈채에 에스티니앙은 자신이 느낀 것도 이 소리에 묻혀 없어질 것이라는 생각을 하였다. 하지만 야슈톨라만 들어가고 이안이 손을 잡고 이끈 사람을 본 순간, 에스티니앙은 눈을 이내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이봐, 내가 이 위치인 거야?"
"그럼 네가 하려고 했어?"
"... 이런 면에선 아직 건방진 게 남아있다니까."
"칭찬 고마워."
무대로 나온 산크레드는 이안과 자세를 잡는 거에서부터 티격태격하였다. 이안은 귀족 도련님이었으니 남자, 여자 춤 모두 알고 있기도 하였지만 산크레드 또한 정보 수집을 위해 춤을 배웠던 만큼 춤을 잘 추기도 하였다. 하지만 신장차이가 꽤 나는 둘이기도 하기에 누가 허리를 잡고 잡힐지에 있어서 약간의 신경전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둘이 웃으면서도 서로가 한쪽이 져달라는 듯 바라보는 그 눈빛과 표정은 에스티니앙의 복잡한 심경을 더욱 건드릴뿐이었다. 불편한 기색이 조금씩 커지기 시작할 즈음 산크레드가 이안의 허리를 잡는 게 눈에 들어오자마자 에스티니앙의 감정은 한계치에 다다르고야 말았다.
'동료여도 불쾌해, 나를 제외한 아무도 닿지 못해, 저리 치워, '
한껏 강해진 불편한 감정은 에스티니앙의 머릿속에 문장으로 퍼져나갔다. 이윽고 산크레드를 뚫어지게 바라보던 에스티니앙은 손에 들고 있던 샴페인 잔을 가장 가까운 테이블에 두고는 이내 연회장 안쪽으로 한걸음 한걸음 발걸음을 향하였다.
"... 사람들이 기다리겠어. 나랑 추지, 이안."
팔을 뻗어 산크레드와 이안이 깍지 잡은 손을 잡고 에스티니앙은 말을 내뱉었다. 평소보다도 더 저음인 목소리에 그를 바라본 둘은 아주 잠깐 눈빛으로 주고받더니 이내 거리를 벌렸다. 자연스럽게 산크레드와 이안의 손깍지가 풀리자마자 에스티니앙은 잡고 있던 손을 떼었다가 그대로 이안의 손을 맞잡았다. 당연히 반대쪽 손으로 이안의 얇은 허리를 잡았기에 단숨에 자세가 만들어지게 되었다. 그런 에스티니앙의 모습을 본 산크레드는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으쓱하며 다시 관중들 속에 들어갔다.
"예전에 배우긴 했지만 난 여성 춤은 몰라. 너는 알 테니까, 맞춰줄 거지?"
"내가 모를 리가 없잖아."
다시 평소처럼 돌아온 표정, 아니 어쩌면 남들보다 더 부드럽게 바라보는 표정에 이안은 웃음을 머금고 답하였다. 자세를 가다듬고 서로 마주한 에스티니앙과 이안의 모습에 많은 사람들의 관심이 둘에게 집중되었다.
전직 푸른 용기사와 전 이슈가르드 귀족 도련님, 이제는 같은 새벽의 일원인 둘.
사람들의 작은 대화소리가 오고 가고 머지않아 바이올린 소리가 들리며 둘은 천천히 스텝을 밟기 시작했다. 외관적으로 매우 잘 어울리는 둘의 조합과 물 흐르듯 이루어지는 춤, 예상 이상으로 호흡을 잘 맞추는 둘에 모두가 감탄하며 바라봤다.
춤이란 둘이서 하나가 되어 움직이는 것이라는 말처럼, 에스티니앙과 이안은 때로는 눈을 바라보다가 때로는 눈을 감고 자연스레 몸을 맡기며 동작을 이어갔다. 춤에서 느껴지는 그들의 신뢰와 그 밑에 깊이 숨겨진 서로에 대한 애정에 아름답다며 감탄하는 사람들도 나오기 시작했다.
음악이 끝나고 둘의 동작도 동시에 멈추자 아까보다도 더 큰 갈채가 둘을 향해 쏟아졌다. 춤이 끝나고서야 에스티니앙은 아까 전 느꼈던 감정 대신 만족감을 느꼈다. 무엇이든 이안과 함께하는 건 언제나 좋았기 때문이기도 하였다.
함께 무대를 나온 둘은 목을 축일 겸 샴페인 잔을 손에 들고 연회장의 발코니로 향했다. 초겨울 밤이었지만 흔하지 않은 쾌청한 날씨였기에 춤으로 뜨거워진 열기를 식히기에는 더없이 알맞은 장소였다.
"춤추는 건 안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 근데 아까 나오면서 보인 눈빛 뭐야? 산크레드도 놀라서 비켜줬잖아."
"다른 사람이 애인의 약한 부위를 잡는 데, 어느 누가 좋아하겠어."
질문이 끝나기 무섭게 나온 에스티니앙의 말에 이안은 잠시 멍하니 그를 바라보며 아까 전 상황을 돌이켜 생각해보았다. 분명 에스티니앙이 나오면서 보였던 눈빛은 약간의 분노가 서려있는 눈빛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산크레드가 들어가고 이안이 다시 그를 바라봤을 때는 평소와도 같은 눈빛이었다. 그때서야 이안은 에스티니앙이 질투라는 감정을 느꼈다는 것을 눈치챘었다. 이렇게 자신만을 바라봐주는 것에 이안은 내심 기쁘기도 해서 그를 바라보며 웃을 수밖에 없었다.
"네가 남을 질투한다니... 정말 해가 서쪽에서 뜨는 거 아닌지 몰라."
"나도 누군가를 이렇게 아끼고 좋아하게 될 줄 어떻게 알았겠어."
"후훗, 그건 나도 마찬가지이긴 하지."
에스티니앙의 말에 이안 또한 동의하였다. 만약 에스티니앙이 다른 사람과 춤을 추고 상대방이 자신이 좋아하는 에스티니앙의 신체 부위에 노골적인 스킨십을 한다면... 자신이라도 기분이 좋진 않았을 테니까.
"그래도 아까 춤 잘 추던데. 연회 거의 안 갔다면서?"
"몸으로 배우는 건 나름 잘 기억하니까. 너도 오랜만에 춤춘 거일 텐데 자연스럽던데."
"칭찬 고마워. 아까 전 수고했으니 건배나 하자."
쨍-
두 사람의 잔이 부딪힘과 동시에 잔이 기울어지며 흐르는 샴페인이 둘의 목을 적셨다. 춤을 추던 그 짧은 시간 동안 서로에 대한 감정이 전해졌기에 이 겨울밤 공기가 차가운 것이 아니라 시원하게 느껴진 것이라고 에스티니앙과 이안은 생각했다.
뜨거운 사랑은 서로에 대한 신뢰를 느끼게도 하나, 상대방과 주변을 보다 보면 질투라는 감정이 생기기 마련이다.
이 질투가 과도해지면 상대방을 소유하고 싶은 집착이라는 안 좋은 방향으로 향하게 되기도 한다.
하지만 질투는 때론 상대방을 얼마나 애정하는지를 느끼게 해주는 좋은 요소가 되기도 한다.
서로가 특별하다는 것을 다시금 느끼고 한껏 단단해지는 둘의 사랑은 한겨울의 추위도 이길 만큼 뜨거웠다.
*황금(7.0) 전에 에스티니앙과 이안이 서로의 마음을 알게 되는 일이 없었다면, 그들이 언제 마음을 고백했을까 하고 써보는 이야기
땅거미가 지며 툴라이욜라의 다채로운 색감은 어느덧 하늘색에 덮였다. 하나둘 거리의 조명이 켜지고 거리가 비치며 이곳 연왕국의 수도에 밤이 찾아왔음을 알리고 있었다. 이곳의 밤을 보다 즐기고자 이안은 도시의 가장 높은 곳으로 향하고 있었다. 조명은 가까이서 보면 하나의 빛이지만 먼 곳에서 바라보면 별처럼 보이기도 해서 이안은 종종 밤의 경치를 즐기고자 자주 높은 곳으로 향하곤 했다. 이 수도에 위치한 가장 높은 곳은 바로 연왕궁의 지붕이었다.
높은 구릉지대에 위치해 있지만 여러 모험을 하며 다져진 체력으로는 이 정도는 가벼운 운동에 지나지 않았고 얼마 안있어 지붕에 도착하였다. 그곳에서 이안은 자신을 기다리던 사람의 모습을 보고 자연스레 미소를 띨 수밖에 없었다.
"이봐 친구, 늦었잖아."
중저음의 목소리로 이안을 친구라고 부르며 먼저 도착해있던 사내. 하늘빛 때문에 옅은 푸른빛을 띠는 긴 은발을 날리는 그는 과거 푸른 용기사이자 현재는 새벽의 혈맹에 소속된 에스티니앙이었다. 평소에 입던 푸른빛을 띠는 갑옷과 붉은 마창을 든 상태가 아닌 편안한 복장을 입고 서 있는 에스티니앙을 보며 이안은 그가 정말로 여유를 즐기고 있다고 생각하며 그의 옆으로 걸어왔다.
"별로 많이 안 늦었거든? 참, 이거 사왔어."
"오, 뭘 좀 안다니까. 이런 곳에서 가볍게 마시는 게 은근 묘미잖아."
"전에 그래서 메리드의 주막에서 마시다가 취해 잠든 건 말이 되고?"
"뭐? 아니 그건 이거랑 다르잖아. 라자한 특산 증류주는 진짜 독하다고."
이전에 메리드의 주막에 갔을 때 처음 증류주를 마셨다가 잠든 에스티니앙을 이안이 발견해서 그를 깨웠던 전적이 있었다. 그 이야기를 장난스레 꺼내니 어지간히 에스티니앙에게 조금 부끄러운 기억이었는지 눈썹을 살짝 꿈틀 하며 라자한의 술에 대한 자신의 경험을 내뱉었다. 그런 이야기도 편히 나눌 수 있을 정도로 에스티니앙과 이안은 동료이기 이전에 친구이기도 하였다.
"내가 사 온 거에도 메스칼이 섞여있는 건데 천천히 마시도록 해. 다음날에 연왕궁 지붕 위에 누가 누워있다고 하면 우크라마트도 놀라서 뛰어오겠어."
"이거야 원... 친구인 건지 잔소리쟁이인 건지 가져온 것도 다 못 마시겠군."
"조심하라는 뜻이야."
한참 술 이야기로 투닥거리던 둘은 지붕 끝에 앉아서 툴라이욜라의 밤 풍경을 바라보았다. 라자한과 비슷하지만 다양한 종족과 부족이 어우러져 살아가는 만큼 다채로운 문화를 한껏 머금은 도시이기도 했다. 이 평화로운 풍경의 뒤에는 오랜 영토 분쟁이 있었지만, 전 연왕인 굴루쟈쟈와 그의 동료들의 노력으로 평화로움과 아름다움을 함께 지닌 국가가 된 것이라는 걸 이번 모험을 통해 몸소 잘 알게 된 둘이었다.
"그러고 보니, 네가 현인 직위를 얻기 전에 위리앙제에게 제안을 받아서 오게 되었다고 했었지?"
"아아 맞아. 현재 이왕인 쿼나님께서 왕위 계승 의식의 조력자를 모집하는 의뢰를 산크레드와 위리앙제가 보고 승낙했었지. 나도 그때 현인 직위 심사가 거의 마무리될 즈음이었는데, 마법대학으로 가던 길에 위리앙제를 만나서 나한테 이야기를 해줬었어. 네가 그전에 서쪽으로 간다고 했던 거도 생각이 났고, 새로운 대륙으로의 모험은 생각만 해도 가슴이 두근거리기도 했으니까."
"교수이기 이전에 모험가라는 거군."
"하하, 맞아. 내 모험은 아직 마침표를 찍을 때가 아니었던 거지. 학장님께서도 내가 아직 젊으니 다시 모험을 할 때가 오면 모험을 해도 된다 하였으니까. 젊을 때 더 보고, 듣고, 느낄 수 있다면서 그렇게 이야기하셨어. 후에 배를 타기 전에 학생들이 어떻게 안 건지, 교수님 꼭 오셔야 한다면서 항구까지 와서 배웅해주고 했다니까."
샬레이안을 떠나 이곳까지 온 이야기를 하면서 에스티니앙과 이안은 투랄 대륙에서의 모험 이야기를 이어갔다. 에스티니앙은 처음 도착해서 이곳에서도 이런저런 것들을 사게 된 일에서부터 연왕 굴루쟈쟈와 대련을 한 것, 샬로니 황야에서 사보텐더를 먹어본 경험 등등 다양한 이야기를 꺼냈다. 그가 말해주는 이야기에 이안은 웃으며 정말 너답게 자유롭게 다니며 모험을 즐겼다며 맞장구를 쳐주고 하였다. 이윽고 '네 모험 이야기를 해 줘'라는 에스티니앙의 제스처에 이안은 자신의 이야기를 이어갔다.처음 도착해 봤던 툴라이욜라의 첫인상, 굴루쟈쟈와의 대련으로 새롭게 잡게 된 전투직인 바이퍼, 워코 조모에서 빛의 전사와 새벽의 동료들을 만나고 함께 발리가르만다를 처치한 이야기, 왕위계승식의 마지막으로 아크텔 밀림을 가서 세노테 내부의 황금향의 문을 가기까지. 이안의 모험담에 에스티니앙도 어느새 집중해서 듣고 있었고, 어느덧 이야기는 그들이 다시 만났던 살로니 황야로 넘어갔다.
"거기서 우연찮게 만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지."
"난 아직도 에렌빌이 지었던 표정이 잊혀지지 않아. 네가 떠나고서 한참을 생각하고 있었다고?"
"사보텐더를 먹었다는 말이 그렇게까지 충격이었나...?"
"야생 사보텐더라고 하면... 아무래도 그런 편이지."
어느덧 첫 술병이 비워질 즈음 하늘은 어두컴컴해졌고 이야기는 큰 사건이 일어난 시점으로 흘러갔다. 갑자기 떨어진 반구와 조라쟈의 침공, 굴루쟈쟈의 죽음, 스펜과의 만남. 그리고 다른 세계가 연결된 입구로 향하기까지.
"그때 나는 남는 것이 좋을지 고민하고 있었는데, 네가 성큼 밀어주어서 고마웠어."
"네 눈이 이미 거길 향하고 있었잖아. 이전에 보이드 세계를 함께 다닐 때와 같은 눈이었어."
"내 눈이 어땠는데?"
"음... 걱정이 있지만 호기심이 더 큰 느낌. 이안 네가 어렸을 때 내가 점프해서 하늘을 보여줬을 때도 신기해서 눈이 빛났던 것처럼. 여전히 궁금한 것에 있어선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은 표정을 짓더라."
'그걸 잘 기억하고 있네' 라며 이안은 잠시 술병을 기울여 술을 한두 모금 마셨다. '열쇠'를 가지고 자신의 세계로 돌아간 스펜을 막고자 함께 황금향의 문으로 향했을 때, 이안은 실제로 이곳에 남아 돕는 게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였다. 하지만 야슈톨라가 그라하와 함께 문 너머로 가 달라는 부탁을 하였다.
'당신들이라면 이쪽에서 문이 닫힌다 해도, 거울세계에서 다시 이곳으로 이을 방법을 찾을 수 있을 테니까요.'
세계를 이었던 자와 그 이음새를 찾고자 했던 자들이었던 그라하와 이안이었기에 야슈톨라가 무슨 말을 하는지 잘 알 수 있었다. 그 말에 그녀가 얼마나 그들을 깊게 신뢰하고 있는지 그 무게가 담겼기 때문이었다.
'물론 이안 당신은 돌아와서 날 많이 도와줘야겠어요. 저 세계로 저도 가고 싶지만, 할 일이 있으니까요.'
야슈톨라의 그 말에 이안은 알겠다는 듯 웃으며 대답하고 두 세계를 연결한 문을 향해 동료들과 함께 발걸음을 옮겼었다. 그때 에스티니앙에게는 특별한 말을 하지 못하고 떠났지만 이안은 말 대신 자신의 등을 보여줌으로써 그에게, 그리고 남은 동료들에게 다녀오겠다는 메시지를 보냈다. 서로가 믿고 자신들의 위치에서 길을 걸어가는 것이 그들의 무언의 신뢰이기도 하였다.
그 이후 황금빛 하늘이 펼쳐진 아름다운 리빙 메모리를 돌아다니던 일을 회상하다가 이안은 그때 만났던 몇몇 영원인들과의 일을 기억해 냈다. 생전에 싸운 채 이별해서 영원인이 되어 만난 부부는 화해하고 남은 시간 동안 행복한 데이트를 즐기고, 생전에 마음을 고백하지 못한 자들은 영겁의 긴 시간이 지나고서야 기적적으로 만나 마음을 고백하여 연인이 되었다. 그 광경을 보며 이안은 에스티니앙을 떠올리며 잠시 과거를 떠올렸다.
'언제부터 내가 널 이렇게 떠올리게 되었을까.'
곰곰이 생각해 본 결과 이안이 교수가 되기 전으로 거슬러 올라갔다. 용시전쟁을 종결하고 각자의 길을 향해 걸어갔던 둘은 이내 샬레이안을 가기 전 새벽의 혈맹의 동료로서 함께 하게 되었다. 샬레이안과 라자한을 함께 다녀보는 것도 잠시 별에 종말이 찾아오면서 그들은 붉게 물든 사베네어의 하늘을 마주하게 되었다. 늘 푸른 하늘을 좋아하던 둘은 다시금 푸르디푸른 창공이 보고 싶어 브리트라님의 등에 올랐다. 처음으로 동료로서, 같은 목표를 가지고 함께 싸우게 된 에스티니앙과 이안은 정말 처음 합을 맞추는 것이 의심스러울 정도로 엄청난 호흡을 보여주었다. 창천에서의 일들과 이전까지 쌓아왔던 서로의 신뢰와 유대가 둘에게 가장 든든한 힘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이후에 하늘 끝까지 날아가 동료의 길을 만들어주는 데에도 기꺼이 함께 하고 하면서 이안은 자연스레 에스티니앙이라면 정말 편하게 믿고 맡길 수 있는 동료 이상의 사람이라고 생각하였다.
다만 귀환 후, 교수와 현인이라는 목표가 생기면서 이안은 한동안 샬레이안에 지내면서 바쁘게 살아갔었다. 그 바쁜 와중에도 힘들거나 피곤할 때 유독 에스티니앙과 있었던 일들이 생각나곤 하였다. 말없이도 종종 챙겨주기도 하며 장난을 쳐서 자신의 정신을 깨워주기도 하고 때로는 등을 맡길 수 있는 든든한 사람. 어느 순간부터 그런 빈자리를 이안은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고 그제야 이안은 자신이 에스티니앙을 친구 이상으로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을 서서히 깨닫기 시작하였다.
'그러고서는 한동안 이게 무슨 감정인지 하면서 열심히 책을 찾아보곤 했었지. 평소에는 잘하지도 않던 상담을 하기도 하고... '
과거의 자신이 떠올라 피식하고 웃어 보이던 이안은 이제는 그 감정을 알고 있었다. 자신이 에스티니앙을 좋아한다는 것을, 친구 이상의 관계가 되고 싶다는 것을. 하지만 이안은 그에게 쉽게 마음을 표현할 수 없었다. 긴 시간 친구였던 만큼 에스티니앙과의 관계가 틀어지는 건 더욱 사양이었다. 무엇보다도 자유롭게 자신만의 모험을 하고 있는 에스티니앙의 모습이 긴 시간 잊고 있던 에스티니앙 자기 자신을 찾은 것처럼 보여서, 여유를 즐기며 유랑하며 살아가는 그의 모습을 응원하고 싶은 마음이 컸었다. 그러나 리빙 메모리에서 터미널이 멈출 때까지 행복한 추억을 보내던 영원인들을 보고서 이안은 한번 용기를 내보는 것이 좋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였다. 자신이 별바다에 갈 때에 이 마음을 전하지 않은 것을 후회하지 않을 자신이 있을지 스스로에게 물어봤다. 이전이었다면 '응, 후회 안 해.'라며 당당히 말할 수 있었지만, 지금은 '아니.'라고 말할 것 같았다.
어느 순간 말없이 술병을 만지작 거리던 이안을 바라보던 에스티니앙은 그가 오랜만에 술을 마셔서 취한 것이라고 생각하곤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안. 너, 술을 너무 마신 거 아니야? 괜찮은 거냐?"
"아아, 미안. 잠시 생각에 잠겼어서 그래."
"사람 놀라게 하기는... 너무 피곤하면 적당히 마시고 들어가자고."
"... 응 , 그래."
살며시 웃어 보이는 이안을 보며 에스티니앙도 잠시 생각에 잠겼다. 사실 에스티니앙도 귀환 후 라자한에서 살아간 이후부터 이안을 볼 때마다 이상한 감정을 느끼곤 하였다. 보이드에서 함께 할 때에는 편안함을 느꼈고 이안이 바빠서 오지 못할 때에는 왠지 모를 허전함을 느끼곤 하였다. 때로는 그의 걱정이 깔린 잔소리까지 그리울 때가 있었다. 그런 감정이 지속되면서 에스티니앙도 이안이 어느 순간부터 자신에게 특별한 사람이 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후에는 이안의 긴 머리카락이 바람에 흩날릴 때마다 자신의 코를 간지럽히던 이안만의 체향이나 어둠 속에서도 유독 빛나보이던 그의 푸른 벽안이 그리울 정도로 감정이 극에 달했던 적도 있었다. 그럴 때마다 이안을 그나마 그릴 수 있던 푸른 하늘이 잘 보이는 높은 언덕 위에 올라가거나 메리드의 주막에서 창가 근처 자리에 앉아 한없이 창 밖을 바라보곤 하였다. 어느 날, 생각 없이 주문했던 음료가 여러 잔이 되고 하늘도 붉게 물든 것도 뒤늦게 깨달았던 날에 에스티니앙은 비로소 자신이 이안에게 단단히 빠져있었음을 깨달았다. 그날 밤에 브리트라와 잠시 이야기할 일이 있어 이야기를 나누다가 자연스레 에스티니앙은 자신의 고민을 조금 털어놓았고, 그에 브리트라는 용과 반려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었다.
'내가 이안과 반려... 같은 관계가 되고 싶은 건가.'
에스티니앙은 그날밤 브리트라가 말해준 이야기를 곱씹으며 중얼거렸었다. 유독 창가에 비친 밝은 달과 검푸른 밤하늘에 빛나는 별 때문인지 그 밤하늘조차도 이안의 긴 머릿결이 떠올라서 그제야 자신이 이안을 좋아한다는 것을 완전히 깨닫고야 말았다. 하지만 에스티니앙이 짝사랑하는 상대는 현인을 목표로 하고 있는 샬레이안의 교수이자 그 이전에는 자신의 친구였다. 귀환 후 이안에게 약 10년 전처럼 푸른 하늘을 보여주고 난 후 얼마 지나지 않아서 에스티니앙은 이안에게 잠시 모험을 멈출 것 같다는 소식을 들었다. 하지만 그 문장 이후 이안이 꺼낸 말은 에스티니앙이 충분히 납득할 수 있는 이유였다.
'네게 새로운 삶의 목표가 생긴 건데, 응원해 주는 게 당연한 거 아니겠어.'
그 말을 해주며 이안이 꿈을 이루길 원했었기에 에스티니앙 또한 자신의 마음을 전할 수가 없었다. 보이드 일이 마무리가 되고서 자신이 서쪽으로 떠난 것 또한 이안이 목표까지 얼마 남지 않아 더욱 바빠졌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기도 하였다.
이렇게 새로운 대륙으로 모험을 떠나기까지 서로에 대해 깊은 감정을 가지고 있는 에스티니앙과 이안은 잠시 동안 말없이 어느새 깜깜해진 툴라이욜라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아까까지만 해도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리고 했으나 이제는 저 멀리 바닷소리만이 더 잘 들리는 듯하였다.
"슬슬 일어날까. 시간도 좀 지난 거 같고."
"그러는 게 좋겠어. 바람도 좀 차가워졌고 말이야."
이안이 사 왔던 술과 안주는 어느새 텅 비워졌고 시간이 꽤 지난 듯하여 에스티니앙과 이안은 자신들이 앉아있던 곳을 정리하고는 일어나고자 하였다. 하지만 술을 마시며 서로의 모험담을 듣고 둘 다 잠시 생각이 많아져서였는지 무의식적으로 둘의 거리가 조금씩 가까워졌었다. 그걸 잊고는 에스티니앙과 이안은 일어나려고 고개를 돌림과 동시에 무언가 맞닿는 느낌을 받았다.
'어' / '잠깐'
스친 건가라고 생각이 들었지만 그렇지 않았다. 몇 초 늦게 입술이 맞닿았던 감촉이 느껴져 둘은 놀라서는 빠르게 몸을 일으키곤 서있는 위치에서 한 두 걸음 물러났다. 이안이 성인이 되고 에스티니앙과 키가 동일해져 여러 번 함께 모험을 하는 기간 동안 몇 번 맞닿을 뻔한 적은 있었다. 하지만 거의 스치기만 했을 정도였고 그런 일이 있을 때는 늘 한쪽이 미안하다는 말로 넘어가는 일이었지만, 이제는 서로에게 마음이 있었기에 에스티니앙과 이안 둘 다 서로의 눈을 바라보며 약간의 눈치를 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 " / "내가..."
어떻게 사과할 타이밍도 잘 맞는 건지 라는 생각을 하며 이안이 에스티니앙에게 먼저 말할 기회를 줬다.
"미안하다. 거리를 두고 일어났어야 했는데."
에스티니앙은 그 말을 꺼내면서도 사실은 싫지 않았다고 말하고 싶었다. 실수로 일어난 일이었지만 어떻게 보면 좋아하는 사람과의 입맞춤이었기 때문이었다. 머쓱하게 뒷목을 손으로 쓸던 에스티니앙은 슬쩍 이안을 바라보았다. 푸른 눈을 빛내며 자신을 지긋하게 바라보는 이안을 보며 에스티니앙은 '아, 내가 뭔가 또 잘못했나.' 하며 살짝 긴장을 하게 되었다. 이내 이안의 입이 열렸다.
"...... 지 않았... 어."
"... 이안, 지금 뭐라고..."
" 사과하지 마.... 싫지 않았으니까... "
작게 말했던 말을 다시 한번 또박또박 말해주는 이안에 에스티니앙은 잠시 눈을 끔뻑거릴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들은 말이 맞는지, 이게 지금 술에 취해서 헛들은 것은 아닌지 머릿속에서 여러 생각이 들기 시작하였다. 이안에게 다시금 물어보려는 순간 살짝 붉어진 이안의 귀 끝과 어느새 자신을 바라보던 푸른 눈동자가 시선을 조금 회피한 것이 에스티니앙의 눈에 들어왔다. 그 모습을 본 에스티니앙은 왠지 모를 두근거림을 느낌과 동시에 확신을 갖고자 이안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아까보다도 더 가까워져 두 사람 모두 서로의 숨결이 들리는 거리가 되었다. 잠시동안 서로를 바라보던 둘은 이내 남은 거리마저 삼킬 듯 입을 열고는 서로를 향한 감정을 표현했다.
서늘한 밤공기가 불어 머리카락을 간질이고서야 에스티니앙과 이안은 얼굴만 잠시 떨어뜨리고 서로를 바라보았다. 다시 한번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고 싶어서였다.
"이안, 너 날 좋아해?"
"그러면 에스티니앙, 너도 날 좋아해?"
같은 질문을 서로에게 물어본 둘은 질문이 끝남과 동시에 함께 입을 열었다.
"어, 좋아해." / "응, 좋아해."
똑같은 답에 에스티니앙과 이안은 피식 웃고는 다시 한번 입맞춤을 이어갔다. 천천히 혀가 얽히고 귓가를 간지럽히는 소리가 나며 방금 전보다도 더 길고 진하게 서로의 마음을 표현하였다. 고백 때문이었을까 친구 이상의 관계로 다가간 느낌에 에스티니앙은 자연스레 이안을 자기 품으로 끌어당겼고 이안 또한 에스티니앙의 품에 자연스럽게 안겼다.
두 사람의 입술이 떨어지고 아까보다도 가까운 거리에서 이안이 에스티니앙을 바라보며 웃어 보였다.
"하하, 우리 좀 웃기다. 둘 다 좋아했으면서 말하지도 못하다가 입술 박치기를 하고서야 말하고."
"너라면 좋아하는 사람이 있으면 말할 수 있을 거 같았는데, 의외인걸."
"에스티니앙 너였기 때문에 말하기가 어려웠어. 난 사랑보다도 친구를 잃는 게 더 싫었으니까."
"그런데 갑자기 용기를 낸 이유는 뭐야?"
에스티니앙의 질문에 이안은 아까 전 회상했던 리빙 메모리에서의 기억을 떠올렸다. 그리곤 잠시 생각하곤 다시 입을 열었다.
"말하지 않고 지니고 있기엔, 아쉬울 거 같아서."
"지금은 좀 후련하고?"
"당연하지. 그리고... 네가 받아줄지 생각도 못했어. 네가 좋아하는 이상형은 나랑은 거리가 멀거라고 생각했는데."
"내 이상형은 나도 잘 몰라. 근데, 이거 하나는 알겠더라."
"어떤 거?"
"언제 돌아오든, 언제 보든 편안함을 줄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거."
말을 끝냄과 동시에 에스티니앙은 이안에게 자연스레 웃어 보였다. 처진 눈과 반대로 올라간 눈썹, 그리고 살짝 입꼬리를 올려 웃어 보이는 그의 웃음은 이안이 좋아하는 에스티니앙의 표정이었다.
'반칙을 쓰네 정말...'
그 웃음 속에 그 말의 이어짐이 담겨있다는 것을 이안은 알고 있었다. 자신이 말한 이상형이 바로 이안, 너라고 라며 말한 것과 다름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와 동시에 에스티니앙에게 자신이 그러한 사람이어서 다행이라고 이안은 내심 만족하고 있기도 하였다. 하지만 먼저 자신을 약하게(?) 만든 죄로 이안 또한 에스티니앙에게 장난을 치고자 하였다.
"근데 나 이게 첫 키스였다는 거 알아?"
"뭐...?"
놀란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에스티니앙에 이안은 더욱 눈웃음을 지었다. '첫 입술을 가져갔으니 책임져'라고 장난을 치는 것처럼 이안은 에스티니앙을 지긋하게 바라보았고 그 웃음에 에스티니앙도 왠지 모를 승부욕이 생겨 웃음을 머금었다.
"이안, 너야말로 날 선택한 거 후회 안 할 자신 있어?"
그의 질문에 이안은 그런 질문이 나올 걸 예상했다는 듯이 바로 입을 열었다.
"후회할 거였으면 고백도 안 했고 좋아하지도 않았어. 되려 말하지 않고 이 마음을 품고 가면 더 후회할 거 같다고 했잖아."
이안의 입에서 술술 나오는 답에 에스티니앙은 졌다는 듯 그를 보고 웃을 수밖에 없었다. 살짝 장난식으로 물어본 질문에 저렇게 진지하게 답한 이안의 말에 거짓 없는 그의 마음이 솔직하게 담겨 있다는 것을 에스티니앙은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와 동시에 에스티니앙은 더더욱 가슴이 두근두근 뛰는 느낌이 들었다.
"정말이지... 말 잘하는 현인들은 못 이기겠다니까."
웃음을 머금고는 에스티니앙은 이안의 현인 마크가 새겨진 손을 잡아 자신의 심장과 가까운 쪽으로 이끌었다. 갑작스럽게 당겨진 손에 이안은 놀랄 새도 없이 에스티니앙의 품에서 그가 이어말하는 말을 들을 수밖에 없었다.
"... 손으로 느껴질지 모르겠는데. 네 말 때문에 나 또한 지금 꽤 두근거리고 있거든. 용을 사냥할 때와는 다른 심장고동이야."
희미하게 느껴지는 고동에 이안은 왠지 모를 부끄러움을 느꼈다. 자신이 말로 그를 이기면 에스티니앙은 행동으로 그를 이겨갔다. 가까워지기 전에도 서로가 말로, 행동으로 투닥거리며 이기고 지고를 반복했지만 사랑을 고백하는 것에 있어서도 이렇게 될 줄은 몰랐다. 하지만 이안은 이렇게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는 에스티니앙이 싫지 않았다. 아니 너무 솔직해서 오히려 좋았다. 이안의 두근거림을 느낀 건지 에스티니앙은 천천히 이안의 손을 자신 가슴에서 떼고는 그 손등을 자기 손에 받치곤 고개를 숙였다. 현인 마크가 새겨진 손등에 가볍게 입을 맞춰 보이곤 고개를 들어 이안을 바라보며 웃어 보였다.
"이걸로 내 답은 충분한 거 같은데, 친구... 아니 이안."
"... 하하, 내가 너한텐 행동으로는 못 이기겠어. 충분하고도 남아, 에스티니앙."
이안 또한 에스티니앙을 바라보며 웃었고 다시금 둘의 얼굴이 가까워지고 짧은 입맞춤이 이어졌다. 아까와는 다르게 짧게 여러 번 입술이 떨어지는 애정표현이었다. 한 손으로는 이안의 허리를 감싸고 다른 한 손으로는 서로의 손을 깍지를 끼고 자세를 취하며 나누는 입맞춤은 친구에서 그 이상의 관계로 넘어온 서로를 받아들이며 그 마음을 받아준 상대에게 고맙다는 듯 표현하는 키스였다.
우연찮은 사고가 쏘아 올린 둘만의 마음 고백 시간이 지나간 후, 예상보다 늦어진 여관까지의 이동에 이안은 서둘러 내려가자는 제스처를 취했다.
"빨리 내려가자. 머지않아 자정이 되겠어."
"괜찮아. 금방 갈 수 있으니까."
아까처럼 이안에게 가까이 다가온 에스티니앙은 가볍다는 듯이 이안을 번쩍 들어 올렸다. 이안 또한 그가 무슨 행동을 취할지 예상하고 스스로 경량 마법을 걸어 에스티니앙에게 부담이 안 가도록 하고 그에게 안겼다. 꽉 잡으라는 말과 함께 훅 하고 몸이 공중에 뜬 느낌이 들었고 어느 순간 이미 툴라이욜라의 여관 앞까지 도착했었다.
'역시 용기사의 점프란... 빠르다니까.'
에스티니앙의 점프에 감탄하던 이안은 자신의 방 앞까지 에스티니앙과 함께 걸어갔다. 잔잔한 파도소리만이 들리고 긴 목재다리에서는 둘의 걸어가는 발소리만이 들렸다. 이안의 방은 가장 안쪽에 위치해 있어 에스티니앙은 그의 방 근처까지 함께 가주었다. 이내 문 앞에 도착하고 들어가라는 듯 바라보는 에스티니앙의 모습에 이안은 아까 전 도착해서 봤던 시간을 떠올리곤 뒤돌아가려는 그를 붙잡았다.
"... 아침까지는 아직 밤은 긴데. 어떻게 할래?"
그 물음과 동시에 살짝 부끄러운 듯 웃어 보이는 이안의 표정에 에스티니앙은 허. 하고 헛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당돌한 도련님 같으니'라는 생각과 함께 에스티니앙 자신 또한 이렇게 헤어지기 아쉽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었다.
"원한다면 기꺼이."
그의 말이 끝나고 둘은 한 방에 함께 들어갔다. 마음을 표현하는 것에는 큰 용기가 따르고 그 마음이 이어짐을 안 순간 심장에 꽃이 피어나듯 뜨거운 느낌이 든다고 하였다. 에스티니앙과 이안은 서로를 배려하여 긴 시간 꽁꽁 숨겨뒀던 마음을 고백하였기에 그 열기가 단순히 입맞춤만으로 끝날 수 없었다. 이제야 여유가 생기고 스스로를, 주변을 볼 수 있게 된 두 사람은 긴 밤 동안 그동안 표현하지 못했던 사랑이라는 감정을 마음껏 표현하였다.
툴라이욜라 여관은 바다를 즐길 수 있도록 침대 뒤쪽에 바다와 연결된 공간이 있었다. 밤에는 찬 공기가 들어와서 평소에는 문을 닫았지만 어제는 긴 시간 동안 감정을 온몸으로 표현한 둘에게는 문을 닫을 필요가 없었다. 그 때문인지 이안이 지쳐 누웠을 때에는 저 멀리 해가 뜨는 것이 희미하게 보였다.
"으음... "
눈가에 닿는 햇빛에 이안은 눈을 찡그리며 잠에서 깼다. 아까까지만 해도 쳐져 있지 않은 커튼이었는데, 아마도 에스티니앙이 잠들기 전 커튼을 친 것 같아 보였다. 눈을 느리게 끔뻑거리던 이안은 천천히 몸을 일으키고자 하였다.
"윽...!"
허리에 오는 통증에 이안은 다시 침대에 누워졌다. 허리를 한 손으로 잡고서야 그제야 밤의 흔적이 적나라하게 보였다. 평소에 늦잠을 자도 이렇게까지 흐트러지지 않은 침대와 겨우 자신의 하체를 가린 시트 옆엔 익숙한 얼굴의 사내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제야 이안도 자신들이 어제 사랑을 나누었다는 것을 다시금 자각하였다.
"어제... 적당히 하자고 그렇게 말했는데... "
잠긴 목소리로 자신을 째려보는 이안의 모습에 에스티니앙은 언제 일어났는지 상의만 탈의한 상태로 그의 옆에 와서 따뜻한 물을 건네어주었다.
"미안해, 이안."
가볍게 턱과 콧등에 버드키스를 하는 에스티니앙의 모습에 이안의 표정이 풀어졌지만 그래도 이렇게까지 만드는 건 너무하다는 듯 다른 한 팔로 등을 때렸다. 어제 힘을 많이 뺀 건지 크게 아프지 않은 그의 폭력(?)에 에스티니앙은 그저 웃어 보일 뿐이었다.
"나 지금 힘없어... 밥 못 해주니까. 오늘 여관 음식 주문 좀 해줘."
"근데 주문해도 일어나서 먹을 수는 있고?"
에스티니앙의 질문에 이안의 눈매가 다시 날카로워졌다. '누구 때문에 이렇게 되었는데'라는 원망 섞인 눈초리에 장난이라는 듯 에스티니앙은 이안이 원하는 메뉴를 주문하곤 그를 새 시트로 감싸 안아 조심스레 발코니에 있는 소파에 앉혔다.
머지않아 주문한 음식이 오고 미동조차 하기 힘든 이안을 위해 에스티니앙은 바삐 음식을 옮기고는 소파에 앉아선 다시금 이안을 자신의 품에 안기게 하였다.
"나 숟가락 잡고 먹을 힘은 있거든?"
"내 마음이야. 자, 안 먹으면 너 한동안 도련님이라고 부른다."
이전부터 자신을 놀릴 때 쓰는 '도련님'이라는 호칭을 이안은 썩 달가워하지 않았기에 결국 두 손두발 들고 입을 벌릴 수밖에 없었다. 갓 만들어진 오믈렛이 입안에 들어오며 이안은 몸에 조금씩 기운이 돌아오는 느낌을 받았다. 오물오물하며 먹여주는 대로 먹는 이안의 모습에 에스티니앙은 이젠 자신의 연인인 이안이 더욱 귀여워 보여 웃음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뭐야 왜 웃어."
눈썹을 살짝 올리고 바라보는 이안을 보고 에스티니앙은 다시금 그의 콧등과 입술에 애정표현을 하였다.
"너...! 진짜... 밥 먹는 데 무슨 짓이야. 더는 안돼."
단호한 이안의 말에 알겠다며 에스티니앙은 그가 원하는 대로 음식을 먹여주고 하였지만, 이안은 아침부터 애취급을 받아서였는지 어느 순간 슬쩍 뺏어가서는 천천히 늦은 첫 식사를 즐겼다. 그에 에스티니앙 또한 늦은 식사를 먹으며 어느새 중천에 뜬 해를 바라보곤 하였다.
어제보다 더욱 쾌청한 날씨 탓일까, 눈앞에 펼쳐진 바다는 에메랄드 빛으로 빛났고 하늘은 청량한 푸른색을 가득 머금었다. 그와 동시에 에스티니앙은 자기 품에 안긴 연인에게서도 여름의 편린을 찾을 수 있었다. 은은하게 나는 상큼한 청귤향과 이곳과 자연스레 어우러지는 청량한 이안의 체향, 그리고 햇빛 때문에 더욱 푸르게 빛나는 그의 긴 검푸른색 장발과 벽안, 마지막으로 시트가 살짝 내려와 보이는 새하얀 피부... 참으로 자기 주변의 모든 것이 어우러져서 완벽한 휴양을 주는 듯하였다.
어느새 밥을 다 먹었는지, 이안이 에스티니앙의 팔을 쿡쿡 찔렀다. 아직은 휴식이 필요한 그의 행동에 에스티니앙은 알았다며 다시금 사랑스러운 연인을 안고 침대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