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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림 조각글, 연성

[에스이안] 한 번의 실수, 넘어선 경계

 
*BL 에스티니앙X빛의 전사(이안)
 
*효월 그 이후의 시점의 이야기
*작성자의 빛의 전사(이안)의 설정은 아래의 링크를 봐주세요.
https://hiro02.tistory.com/4 
*글이 서툽니다. 양해 부탁드려요 ;) 


 
평소와 같지만 어떠한 낯선 감각을 느낄 때, 우리는 흔히 '어떠한 일'이 일어났다고 직감한다.

에스티니앙은 그러한 감각을 느껴 천천히 눈을 떴다. 술을 많이 마신 다음날 흔히 보는 아침의 햇빛이 커튼 사이로 들어왔다. 그 빛에 주변이 보이면서 비로소 그는 평소와는 다른 곳에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과거 푸른 용기사 시절부터 지금의 새벽의 혈맹의 일원이 되기까지 에스티니앙은 여관 또는 해당 지역주민들의 도움을 받아 공간을 얻어 하룻밤을 묵곤 했다. 그러한 경험 때문에 여기가 결코 여관이 아니라는 것은 알 수 있었다. 무엇보다 흔치 않은 푸른빛의 벽지와 화려하지만 사치스럽지 않은 커튼이 방 곳곳에 걸려있었기에 일반적인 사람의 방이 아니라는 것도 말이다.

'누가 봐도 귀족 나으리 취향인데.'

자신에게 어울리지 않는 공간에 있다는 것만으로 기분이 썩 좋지가 않아 진 에스티니앙은 결국 몸을 일으켰다. 피로감이 가시지 않았는지 평소보다 무거운 느낌을 느꼈지만 이내 그 불편함과 남아있던 잠은 침대 주변에 보이는 것들로 인해 뒷전이 되었다. 그리고 그제야 에스티니앙은 자신이 왜 이 공간에 있는지 그 이유를 대충은 알게 되었다.

침대 주변에 흩어져 있는 옷가지와 이불을 걷으면 전라가 되는 자신. 이 두 가지가 어젯밤의 사건을 보여주고 있었다.

"......"

눈에 보이는 것들에 한동안 멍하니 앉아있었던 에스티니앙은 이내 정신을 차리고는 자리에서 일어날 준비를 하였다. 그나마 옷가지가 손에 닿는 거리에 있어 다행이라 생각하며 챙겨 입던 중 이불 밖으로 살짝 나온 누군가의 손이 있었다. 여러 전투와 훈련으로 굳은살과 흉터가 있는 자기 손과는 정반대인 약간의 생채기만이 있는 손이었다.  마치 자신의 손은 소중하다는 듯 햇빛을 받아 더욱 하얗게 보이던 그 손을 보고 에스티니앙은 순간 여자의 손인 줄 착각할 정도였다.  대형사고가 그려지는 미래에 그는 유심히 손가락의 길이와 약간의 굵기를 보고서야 누워있는 자가 사내라는 것을 알았다. 

'참 나, 사내놈이랑 뒹굴었다니... 당분간 술을 조심해야겠어.'

에스티니앙은 자신의 취향에 대해 의문이 들어하며 고개를 갸웃하다가 이내 이불에 몸을 숨기고 있는 남자를 흘긋 바라봤다. 얼굴까지 이불로 가리고 있기에 곤히 잠든 건가 하면서도 참 특이한 취향을 가진 사내겠구나 라는 생각을 하였다. 모든 사람이 자신을 알진 않더라도 다가가기 어려운 분위기라는 말을 여럿 들은 바가 있었기에 에스티니앙은 지금 아무것도 모르는 듯 누워있는 사내가 배짱 한번 좋다고 생각했다. 무엇보다도 그 전직 푸른 용기사를 건드리다니 말이다. 

그러한 호기심이 연결되어 에스티니앙은 저 남자가 누구인지 궁금해졌다. 

'누구인지나 한번 보고 가자고. 설마 아는 사람이겠어.'

볼 것인가 말 것인가 손을 주저하다가 결국 결심을 한 듯 그는 조심히 이불을 걷어 내렸다. 부드러운 흰 이불이 걷어지면서 그 주인공의 모습이 드러났고 에스티니앙은 순간 놀라 크게 뒷걸음질을 할 뻔했다. 검푸른색의 중단발 길이의 머리, 새하얀 피부, 숲 종족 특유의 흰 귀걸이를 끼고 누워있는 남자는 그가 너무나도 잘 아는 사람이었다. 운이 나쁘게도 눈가에 닿는 빛에 누워있던 남자는 천천히 눈을 떴고 머지않아 매우 놀란 표정을 지으며 에스티니앙을 바라봤다. 

"... 어이, 친구. 네가 왜 여기에..."

"그건 내가 할 말이야. 여기 내 집인데. 이게 지금 무슨 상황이지?"

푸른빛이 도는 흑발을 손으로 간단히 정리하고 몸을 일으킨 그 남자는 아까의 에스티니앙과 똑같은 표정을 지으며 상황을 파악하고자 했다. 다만 일어나며 어딘가 통증이 있는지 허리를 부여잡았다는 점에 차이가 있었다. 한참 멍하니 주위를 둘러보던 남자는 고개를 들어 다시 에스티니앙을 바라봤다.

"우리 어제 설마.. 그런 건가."

"그런 거지.. 게다가 아마 네가... 당한 거 같은데 말이지."

"어쩐지 안 아프던 허리가 아프더니만.."

"미안하다, 이안."

이안이라고 불린 그 남자는 난감해하는 표정의 에스티니앙을 바라보곤 기억을 떠올리기 시작했다. 어제 그와 오랜만에 술을 마셨던 건 분명했다. 평소보다 더 마신다는 건 느꼈지만 둘 다 술을 잘 마셨기에 그리 아랑곳하지 않고 분위기를 즐겼었다. 그 후로 시간이 늦어 자기 집에 남는 방이 있으니 편히 자고 가라고 했던 것까지는 분명하게 기억이 났었다. 단지 그 뒤로는 그림의 한 장면처럼 부분 부분만 기억이 날 뿐이었고, 스쳐 지나가는 그 장면이 하나같이 그와 절대 일어나기 어려운 일들이었다는 것이었다. 자신이든 그든 어느 한쪽이 미치지 않고서는 말이다. 

'정말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지...'

이안은 깊은 생각을 하며 습관처럼 두 손을 모아 그 사이에 잠시 얼굴을 묻었다. 에스티니앙에게 사랑과 같은 마음이 있었느냐라고 스스로에게 물어봐도 바로 아니라고 답할 수 있었다. 그와는 친구이고, 전우이며 이제는 동료인 관계일 뿐이었다. 한 가지 차이라면 다른 사람들보단 어릴 때부터 오래 알고 지낸 사이라는 점이었다. 하지만 단지 그것뿐, 육체적 관계를 가질 정도였는지에는 여전히 의문만이 가득했다.

골똘히 생각하는 이안의 모습을 보던 에스티니앙은 잠시 머리가 지끈거려졌다. 이안이 생각한 것처럼 그 또한 단지 자신보다 어린 남동생 같은 느낌이자 동료이며 친구로 생각했었다. 심지어 그가 용기사단 소속이었던 당시, 이안의 쌍둥이 형이 자신의 후배로 있었으니 그를 어떻게 생각해 왔을지 크게 설명할 필요가 없었다. 그렇기에 이 방에 머무는 시간이 지나갈수록 자신의 행동에 대한 죄책감이 커질 뿐이었다.

'저렇게 어린애를 건드렸으니, 정말이지 할 말이 없군.'

무거워지는 마음에 에스티니앙은 이안을 바라보던 눈길을 돌려 창문을 바라봤다. 시간이 낮에 가까워졌는지 조금 더 강렬한 햇빛이 들어오면서 열린 틈사이로 바닷바람이 들어오며 자연스레 머리카락을 간지럽혔다. 마치 지금은 떠나야 하지 않겠냐는 듯이 말을 거는 듯이 말이다.

"일단은.. 서로 시간이 필요할 듯하니. 가보도록 할게. 몸조리 잘하고 있고."

"... 그래. 말할 게 있거나 생각나는 게 있으면 연락하고."

이안의 말에 에스티니앙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손에 쥐고 있던 셔츠를 입고 자신이 나갈 수 있을 정도로만 창문을 열고 뛰어내렸다. 땅에 안전히 착지를 하고 일어나 뒤를 돌아보니 자신이 방금 전까지 있었던 고풍스러운 주택이 보였다. 보는 사람이 없길 바라는 마음인지 어느새 창문은 닫혀있었다. 조용한 것을 좋아하는 그의 취향 대로 건물은 샬레이안의 외곽에 위치해 있었기에 지나가는 사람도 거의 없었다. 단지 푸른 바다만이 보일 뿐이었다.

"조심성 많기는. 그게 너 다운 것이지만."

아무 일이 없었다는 듯 언덕을 내려가는 에스티니앙을 이안은 창문 너머로 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의 모습이 작아졌을 즈음 밤의 현장을 보여주는 공간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흔적을 지우려는 듯 평소보다도 더 꼼꼼히 정리를 하여 어느새 방안은 본래의 깔끔한 상태로 돌아왔다. 다만 여전히 자신의 속마음은 정리가 되지 않았기에 아래층으로 내려와 자주 마시는 차를 내렸지만 이내 한두 모금만 넘기고는 찻잔을 내려놓게 되었다. 애꿎은 찻잔을 매만지며 이안은 이제는 에스티니앙을 어떻게 봐야 하는지만이 고민으로 남았다. 그리고 머릿속에 스쳐 지나가는 형의 모습에 난감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형이 알면... 분명 이슈가르드에서 여기까지 천체강하 찍으러 올 텐데."

더는 들어가지 않던 차를 버리고는 이안은 나갈 채비를 하기 시작했다. 집에 있어봤자 흔적을 지웠다 한들 지나다니며 생각이 날 것 같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바다를 보고 잠시 시간을 가지면 정리가 될 것이라고 믿은 부분도 없지 않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결론이 이렇게 밖에 나지 않는데...'

물줄기 소리가 잔잔히 들리는 라스트 스탠드에 이안은 자리를 잡고 한참 동안이나 앉아있었다. 오자마자 주문을 했던 커피는 이미 식은 지 오래였고 그저 배를 채울 용도로 산 현인빵은 입에 대지도 않았다. 풀리지 않던 의문에 대한 추측의 물방울이 하나 둘 연결이 되어 물줄기가 되면서 머릿속은 정리가 된 상태였다. 다만 이 가설이 들어맞는지에 있어서는 자신이 없었기에 이안은 잠시 멍하니 동상에서 떨어지는 물과 바다를 보며 생각에 잠겼다.

'물이 모여 바다가 되고 순환하듯, 감정도 물과 같은 것일까.. '

이안이 내린 결론은 간단했다. 오랜 시간 알고 지낸 사이인 만큼 자연스럽게 느낀 편안함, 거기에 술이 많이 들어가며 이성이 풀리며 아슬한 경계에 있던 선을 서로 넘어버렸다는 것이었다. 말로는 형용하긴 어려운 순간의 욕망과 그 당시 느낀 감정을 따라 순순히 움직인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가능성이 없지 않은 일이라고 답을 내렸다. 

어느덧 해가 수평선 아래로 저물어 가고 있었다. 그와 결론을 짓고자 이안은 주저하지 않고 링크셀로 연락을 했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 받는 그의 목소리에 같은 생각을 했었구나 하고 이안은 작게 미소 지었다.

"... 지금 갈게. 어디야?"

들려오는 장소는 그가 예상한 대로였기에 이안은 바로 텔레포를 타고 도착했다. 후끈한 열기가 몸에서 느껴지며 라자한에 도착했다는 것을 몸소 느낄 수 있었다. 도시 한가운데에 위치한 에테라이트 저 너머 높은 곳을 바라보고는 다시금 이동하였다. 문을 열자마자 보이는 아침부터 봤던 얼굴에 이안은 평소처럼 걸어와 바로 맞은편에 자리를 잡았다.

"꽤나 많이 고민을 한 모양이지?"

"그런 말하는 너야말로 이 앞에 있는 건 뭔데."

넌 아니라는 듯 말하지 말라며 이안은 자신 앞에 있는 것들을 가리켰다. 한 개도 아닌 세네 개는 족히 되어 보이는 라씨 잔에 에스티니앙은 자신이 언제 저렇게 마셨는지 몰랐다는 듯 잠시 할 말을 잃었다.

"라자한 주막이었어서 다행이지. 밖이었으면 얼마를 또 내셨으려나."

"이봐, 내가 내 돈을  쓰는 거잖아."

"새벽 금고지기에게 들은 잔소리가 많이 부족했나 보지?"

딱 걸렸다는 듯 바라보는 이안의 표정과 말에 너까지 쩨쩨하게 굴기 있냐며 에스티니앙은 어깨를 내리며 못 이기겠다는 표현을 보였다, 약간의 침묵이 오가고 이안이 먼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서로가 익숙하고 편해서 일어난 일이었던 거 같아. 너도, 나도. 알아온 시간이 남들보다도 길잖아."

"하지만 넘으면 안 될 선을 넘은 거지. 게다가 난 네 어린 시절도 봐왔으니까 더더욱 그랬으면 안 되었어."

"책임 쳐달라는 말은 안 할 거니 걱정하지 마. 단지 그 이후를 바라보고 물어보는 거지. 에스티니앙 너도 언제나 떠돌며 살 건 아니잖아."

"귀족 도련님이랑 신혼집 차려 사는 건 내 계획에 없었는데 말이지."

"언제적 도련님 이야기야. 집 나온 지가 벌써 20년은 넘었는데."

피식 웃으며 답하는 사이 어느새 종업원이 라씨 두 잔을 가져다주었다. 하루 종일 먹은 것이 없던 이안은 잔을 살짝 잡고 흔들다 이내 마른 목으로 음료를 넘겼다. 그의 모습을 보던 에스티니앙은 분명 오기 전까치 한참 고민하다가 끼니도 제때 못 챙겼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자신과 비슷하게 툭툭 내뱉으면서도 은근히 남을 챙기고 배려하는 그의 모습에 잘 컸구나 싶으면서도 내심 자신이 기억하는 어릴 적 모습과 크게 변하지 않았기에 에스티니앙은 다시금 또 웃고야 말았다.

"뭐야. 뭐가 웃겨서 그렇게 웃는 건데."

"예전이랑 바뀐 게 없어서. 그냥 사고라고 넘길 만도 한 건데도 이렇게 신경 쓰는 걸 보면 여전히 바뀐 게 없다니까."

"뭐야?"

"그래서, 우리 현인님께서는 나와 여생을 보내고 싶다 이건가?"

"애초에 난 연애는 생각해 본 적이 없기도 하고. 오래 안 사이인 만큼 자연스럽게 편하다고 느껴서 술 마시고 그런 일까지 치렀으니. 무의식적으로도 증명한 꼴이니까. 시간을 갖고 생각해 봤지만 너랑이라면 꽤나 나쁘지 않겠다 싶었어. 물론, 선택은 네 몫인 거고."

한번 툭 던진 말에 나쁘지 않았다는 듯 답하는 이안의 모습에 에스티니앙은 잠시 말문이 막혔다. 아직 젊어서라고 생각을 해야 하나 싶었지만, 그가 절대로 가볍게 말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녀석과 함께라...'

사실 이미 에스티니앙도 답을 알고 있었다. 이전에는 자신의 죽은 남동생과 비슷한 느낌으로 봤었지만, 이제는 동료이자 친구로 더 보고 있다는 것과 자신도 이안과 함께 있을 때는 꽤나 편안함을 느낀다는 점에는 그 또한 동감하는 바였다. 무엇보다도 자신과 잘 맞는 부분이 있었기에 종종 '이 친구와 함께인 거도 나쁘진 않겠다'라는 생각을 안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단지 친구와 연인의 그 경계를 넘어도 되는 것인지와 나이차이에 쉽사리 말을 꺼내지 못했던 것이 컸다.

'이미 답은 정해져 있는데, 망설일 필요가 있나.'

옅은 숨을 내쉬고 에스티니앙은 입을 열었다.

"아직은 한 곳에만 박혀 지내고 싶진 않은데 말이지. 그래도 한 달에 몇 번 얼굴 비추는 거라도 괜찮다면 나도 나쁘지 않군 그래."

"집 정도야 두 채 정도는 마련할 수 있어. 사베네어 섬이 좋다면 여기서 자주 머물다가 가끔 시간 나면 올드 샬레이안으로 와."

"나쁘지 않군. 그러면 뭐... 오늘부터 다른 호칭으로 라도 불러주면 되나?"

"안 어울리니까 그러지 말라고. 말 한지 1분 만에 도로 철회하는 수가 있다?"

말로 서로를 이기려는 듯 두 사람 모두 건드려보라는 듯한 자신만만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하지만 정말 서로가 잘 맞는다는 듯 눈으로 바라본 두 사람은 이내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오늘은 여기서 자고 내일 일어나자마자 집이나 알아보자고."

"초야 치른 지 얼마 안 되었는데 그리 밝히는 취향일 줄은 몰랐는데."

"... 내가 언제 같이 잔댔어. 총으로 맞고 싶나 보지?"

"오늘 하루종일 생각하느라 몸이 뻐근한 참인데, 상대해 준다면 나쁘지 않은데?"

한 마디도 지지 않는 두 사람은 이내 자리에서 일어났다. 처음에 왔을 때보다는 조금 소란스러운 모습으로 나갔지만 둘의 표정은 마치 즐거운 듯 보였다. 긴 시간 동안의 익숙함, 그리고 그것이 바탕이 되어 서로가 가장 잘 이해해 줄 수 있는 상대라는 것을 깨달은 순간부터 어떠한 감정이 서서히 커져가는 것을 아직은 알지 못하였다.


어느덧 계절이 지나고, 다시 새로운 해가 시작되었다. 샬레이안 마법대학은 새로운 입학생들을 맞이할 시기였기에, 이안 또한 평소보다 일찍이 나갈 채비를 서둘렀다. 현인 마크를 달고 여러 논문과 학설을 발표하면서 능력을 인정받아 시간이 날 때는 어린 학생들을 가르칠 수 있는 자격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강단에 서서 첫 학기의 강의를 끝내고 처리해야 할 일을 하다 보니 어느덧 해가 저물어가고 있었다. 빠르게 남은 일을 마무리하고는 이안은 자신의 연구실을 나와 대학 복도를 걸어가기 시작했다.

'... 오늘도 역시 없겠지.'

자주 오지 않는 애인, 아니 이제는 언약식까지 올렸기에 남편인 에스티니앙을 잠시 떠올리던 이안은 이윽고 마법대학 문을 나섰다. 하지만 그의 생각이 틀렸다는 듯 대학건물 바로 옆 나무 쪽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이봐, 기다리다 지쳤잖아. 매일 이 시간에 나오는 건가?"
 
이전에 수업에 한번 초청했다가 학생들의 질문 세례를 한번 받고는 더 이상 대학건물에 가까이 가지 않겠다고 말했었던 그가 왜 여기에 서 있는지 이안은 잠시 골똘히 생각했다. 멈춰있는 이안의 모습을 보고 에스티니앙은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단번에 알고는 입을 열었다.
 
"서방님께서 친히 행차하셨잖아. 일에 치여 벌써 얼굴이라도 까먹은 건가? "
 
"... 발도 들이지 않겠다던 사람이 여기까진 무슨 일이람?"
 
"뭐긴 뭐야. 오랜만에 얼굴 좀 보러 왔지."
 
이안은 순간 자신이 잘못 들었나 싶어 살짝 놀란 표정으로 에스티니앙을 바라보았다. 눈이 서로 마주치고 에스티니앙은 마치 '왜, 뭐가 잘못되었어?'라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참 별 일이 다 있네. 보고 싶어서 오고 말이야."
 
"겸사겸사 네 요리도 먹고 싶곤 말이지. 솜씨 하나는 나도 인정하잖아."
 
"방금까지 일하고 온 사람한테 요리까지 시킨다고? 값 좀 받아야겠는데."
 
먼저 발걸음을 옮긴 이안의 표정을 본 에스티니앙은 이내 짧게 웃고는 그의 뒤를 따라갔다. 
 
'말은 그렇게 하면서 해줄 거 다 안다고.'
 
새침하게 대하면서도 웃는 표정을 짓고 있었기에 그가 어떻게 할지를 에스티니앙은 이미 눈치챘었다. 못 본 사이에 허리까지 긴 검푸른 머리카락이 바닷바람에 휘날리며 그에게 나는 은은한 체향이 코끝을 간지럽혔다. 오랜만에 봐서였는지 에스티니앙은 그 모든 게 꽤나 귀엽다는 생각이 들었고 한편으로는 한번 다시 놀란 표정이 보고 싶어 보폭을 넓혀 앞에 가는 그와의 거리를 좁히고는 이름을 불렀다.
 
"이안"
 
자신의 이름에 뒤를 돌아본 이안은 놀랄 틈도 없이 몸이 들어 올려지는 걸 느꼈다. 품에 안고 있던 책이나 서류가 빠질까 꼭 끌어안으니 어느새 에스티니앙의 두 팔에 자신이 안긴 자세가 되어있었다.
 
"... 뭐, 뭐야. 내려놔. 빨리! 학생들 보잖아!"
"그 보폭으로는 내일 새벽에야 도착할 거 같아서 말이야. 꽉 잡고 있으라고."
"소문내고 싶어서 그래?! 점프는 사야ㅇ..!!"
 
당황한 이안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에스티니앙은 크게 도약하여 하늘 위로 솟구쳐 올랐다. 성인 남성을 들고 있었음에도 자신의 발걸음은 매우 가벼웠다. 아마도 자신의 반려의 모습을 보고 그에 만족하는 표정을 봐서 기분이 좋아서였을 것이다. 비록 집에 도착하면 품에 안긴 자신의 사랑스러운 남편에게 잔소리를 듣겠지만 그 또한 어린 남편의 귀여운 표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밤엔 좀 짓궂게 굴어볼까.'
 
에스티니앙은 자신의 속내를 모른 채 품에 꼭 안겨 있는 이안을 보다 꽉 잡은 채로 집이 있는 방향으로 몸을 틀었다. 아직 남은 하루는 길기에 둘이서 더 보내고 싶은 조급함이 바람을 가르는 듯했다.